
글쓴이, CRO
드라마 바람의 화원ost - Title Theme
*서라벌이 경주라는 것을 감안하여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고증하였습니다.
나리화담(化談)
-부제: 아라비아 상인의 여행기-
8세기, 바그다드의 술탄의 왕궁.
지금부터 주군께 들려드리는 이야기에 대해 믿으시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직접 보고들은 저 또한 이것이 실재한 일이 맞는지에 대해서 웃음이 날 때도 있기 때문이니까요. 이 이야기는 멀리 동북쪽에서 전해 내려왔습니다.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로 기세가 강하며 대외 교류와 정치적으로도 균형 잡혀 있는 그야말로 작지만 결코 약하진 않은 국가입니다.
영토 확장을 하느라 애를 먹은 신라는 안정기가 오면서 생산 인구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부가 크게 축적되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어느 호족 집안 사내의 이야기 입니다. 아, 사내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여인과의 우정이나 연정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까요? 들으시면서 판단해주십시오.
어디든 그렇겠지만, 시장은 항상 붐비기 마련입니다. 신라 그러니까 계림의 수도는 서라벌로 도성 내는 장날이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무역을 일삼는지라, 이따금 들르는 곳이지만 언제 가도 화려하고 다양한 이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지요.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곡식, 잘 드는 무기, 고운 장신구들이 즐비 했습니다. 여러 번 오가다 보니 눈에 익는 상인도 생겨나 인사도 나누곤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막 아이들 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소녀들이 장터의 외진 골목 어귀에 몰려있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곳은 워낙 어두침침하여 저도 발을 디뎌 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만, 사람들이 모여있는 생경한 풍경을 보고 있자면 호기심이 이는 법이지요. 저는 무리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 보았습니다. 인파 사이로 시선을 파고들며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파악하려 애썼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글쎄 여러 권의 서책들이 지푸라기 멍석 위에 늘어뜨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엔 각종 역사서나 논어 같은 지덕을 쌓는 서책은 물론이거니와 야사 집, 민담이나 설화집으로 보이는 낡은 서책도 있었으며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춘화 집 같은 것들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더랍니다. 책 상태를 보아, 정식으로 나온 서책은 아니한 거 같았습니다. 저도 잡상인이지만 척하면 척이지요.
아마도 서책을 받아적어 밀매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애초에 글을 배울 수 있는 서책을 못 구하기에 글을 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책에 대한 수요가 있을 리가 없지요. 특히나 여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높은 관료의 여식도 글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런데도 왜 소녀들로 복작이나 해서 귀를 기울였더니 책팔이가 글쎄 글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있지 않겠습니까? 책팔이라는 말은 듣기가 좀 그러하니 책쾌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밭에서 힘을 쓰는 모양새가 사내 같다고 하여, 사내 ‘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옆에 이 글자는 여인의 몸이 가진 형태를 닮았다 하여 계집 ‘녀’라고 합니다. 저번에 제가 알려준 글자를 잘 엮으면 여기 문집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남녀유별 男女有別’이라고 부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가 분별이 있기에, 하는 일에 있어 구분을 하여야 한단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지식을 나눔에 있어 여인과 사내의 구분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알아서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요. 부디 제게 배운 문장들을 토대로 생활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쾌의 말이 끝나자 소녀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멍석에 있는 서책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흥미롭게 바라보았지요. 글을 알면 재미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으니 소녀들은 잔뜩 들떠 보였습니다.
“이다음에는 어떤 서책을 읽어주실 겁니까? 내 나리만 목 빠져라 기다린답니다.”
“서역에서 전해오는 신화도 마저 이야기 해주셔야지요.”
책쾌는 그런 그녀들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고요. 흐뭇해 보였습니다. 인기가 상당했습니다.
놀란 점이 있는데, 소년은 그냥 곁눈으로 보아도 아직 풋풋하고 어린 사내였습니다. 아니, 생긴 것이 마치 기생오라비 마냥 참으로 고왔달까요? 계림을 그렇게 자주 왔음에도 그리 고운 이를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소녀들이 책과 글을 깨우치는 것,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외에도 책쾌가 곱상하여 구경 오는 맛이 쏠쏠할 것 같았습니다.
빤히 보다간 이거 사내에게 혼이 뺏기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시선을 애써 피했지요.
“그리스 신화는 내 이다음에 일러주겠습니다. 이제 일어나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서책이 있다면 가지고 오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책쾌가 급히 자리를 접는 통에 소녀들은 섭섭함을 숨기질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워도 장사를 종일 할 순 없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소녀들이 하나, 둘씩 걸음을 옮길 때쯤, 저도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려고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내의 목소리가 제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또, 또! 훔친 서책으로 동네 아낙들한테 알랑거리고 있노? 내 그 짓 좀 하지 말라고 말 안 했나?”
키가 장승만 한 청년 하나가 대뜸 와선 책쾌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등장에 소녀들은 놀라 빠르게 달아났습니다. 저는 빠른 걸음으로 몸을 피하는 여인 하나를 붙잡고서 저 이는 대체 누구냐고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육두품을 지내시는 공대감님댁 장남 태성 도련님이십니다. 성질이 불같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지요. 또 책쾌 나리한테 저러시네....”
여인은 칠색 팔색하며 자릴 떴습니다. 저 또한 괜스레 높은 집안 자제와 안 좋게 엮여 좋을 게 없으니 자릴 뜨려 했던 참이지요. 그러나 이 뭐든 궁금해하는 성미가 제 문젭니다.
“훔친 책이 아닙니다. 서당의 훈장으로 계셨던 저의 조부님께서 안 쓰시는 서책과 부두를 오가며 떠드는 상인들이 버린 문집을 모아서 나누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도령에게 밀리지 않는 책쾌의 기세 또한 상당했지요. 저는 매우 궁금한 나머지 둘의 대화를 조용히 엿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닌 듯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지식 자랑하고 싶으마 과거를 치르고 학자나 관료해뿌면 되지, 남의 집 가는 길목에서 이카고 있는 꼴 언제까지 봐야되노?”
“밭도 아니하고, 이 길목은 도련님댁 소유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소유고 자시고 간에 남의 집 마당이나 다름없는 데서 말도 없이 장사하고 있으이 내 하는 말 아이가? 하, 진짜 짜증 나게 하네. 여러 번 설명하게 하지 말고 끄지라!"
태성 도령이라는 자가 글쎄, 책쾌에게 냅다 짜증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장사를 어디 하루 이틀 해보겠습니까?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짜증을 내는 것이 단순히 사내가 화가 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투정 같았습니다. 아낙들에게 친절한 책쾌에게 괜스레 심술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에게 인기가 두루 있는 것을 시기 한다기 보다는 저 또한 친밀하게 봐달라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죠. 제가 이런 건 귀신같이 안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책쾌 청년이 나리꽃(*백합의 옛말)같이 아름답긴 하나, 엄연히 같은 사내인데 애정 섞인 관심을 갈구하는 것은 어째 부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이 곳 바그다드에서도 드문 일인데, 이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예와 법도를 따지는 계림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부정하고 싶었겠죠, 공태성 도령은. 제 감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높은 관료를 지내는 아비 밑에서 자랐으니 얼마나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겠습니까? 이에 흠결이 날 수 있는 낯선 감정, 남색이라고도 하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애먼 책쾌에게 으르렁대는 것이고요. 척 봐도 척이었습니다. 그러나 웃긴 건 책쾌 청년도 사람들에게 저가 쉬이 호감을 사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고, 청년 또한 그래 보였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여유가 느껴졌거든요.
너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지.
책쾌의 자신만만한 눈빛과 살포시 올라간 입꼬리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째 여길 지나칠 때마다 빼먹지 않고 제게 아는 척을 해오십니다. 인사치곤 거칠지만 말입니다."
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얼굴을 붉히며 움찔대는 태성 도령의 태도가 제 예상에 확신을 줬습니다.
"뭐, 뭐라카노! 지... 진로방해를 그마이 하는데, 카면 내가 지랄을 안 하게 생깃나? 참나..."
"반가워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도강녕해보이시니 보기 좋네요. 저는 일을 다 보았으니... 진로방해는 여기까지 하고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찍도 간다 카네. 크흠! 밤 되기 전에 꺼지라, 해지고 울 아부지가 니 이카는 거 보면 뭐라카신다. 내가 칼 때 잘 하라고!"
"걱정이십니까?"
"아이, 진짜!"
"가보겠습니다."
곱상한 책쾌에게 밤길을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것도 까먹지 않았습니다. 생색이랍시고 그를 염려하는 티를 내는데, 심장 소리가 제 귀에 까지 들리는 것 같았
습니다. 책쾌는 그 말 뒤에 숨은 의미 또한 파악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싱긋 웃어 보이곤 묵례를 하고서 길목을 떠났죠. 그리고 태성 도령은 그가 가는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길너머 까만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멈춰서요. 저는 이를 지켜보던 것을 들킬까 싶어 발을 돌렸습니다. 그게 서라벌에 비단 팔러 온 첫날 있었던 일입니다. 요즘엔 제 수하에서 일을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나 타국에 와서도 여유롭다 못해 무료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날도 비슷한 시각에 저는 책쾌가 책을 파는 골목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역시나 책을 읽어주는 책쾌는 마을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날은 뭔가 특별했습니다. 당시 계림은 가까운 타국으로부터 지리나 천문학 같은 새로운 학문을 담은 서적들이 활달하게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계림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명리학'이라고 하여 신술(神術)-천지의 형태와 움직임을 이해-과 사술(四術)-시간과 공간의 관계 예측-로 이뤄져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본래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던 학문이었습니다.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용이한 학문이라 하여 명장이나 고위 인사의 출생 시기와 장소에 따른 운명을 전망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이런 학문을 일반 백성이 알아봐야 쓸모가 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세상에 버릴 학문은 없지 않습니까? 명리학을 이용하여 책쾌는 나이가 찬 숙녀들이 가장 궁금해할 애정사에 대해서 점을 치는 일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쌀쌀한 계절이면 옆구리가 시린 것은 만국 공통인가 봅니다. 여인들은 제게 맞는 짝은 언제 만날 수 있으며, 어떤 이와 합이 맞는지를 알고싶은 모양이었습니다.
"나으리, 나는 꽃과 같이 태어났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저를 키워주는 빗물 같은 이를 만나야 길합니까? 꽃의 만개를 뽐내게 하는 태양 같은 이를 만나야 합니까?"
이러한 질문을 책쾌에게 하며 질의를 하면 책쾌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답을 해주었지요.
"태양도 물도 길하나, 낭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위입니다."
"네?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바위가 꽃을 찧어버리면 어떡합니까?"
"바위는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낭자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게 피어난 꽃인지라 타고 자라날 바위가 있으면 지금보다 더욱 높은 곳으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도약은 곧 발전을 의미하지요. 지금보다 더욱 근사하고 튼튼한 꽃나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책쾌는 듣기 나쁜 말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점괘란 보통 겁을 주거나 금기를 알려주는 것이 주된 내용임에도 오히려 어려움을 극복하여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대부분이었지요. 여인들은 저마다 제 운명에 관해서 물어왔습니다. 원래 그렇잖습니까? 과거는 후회를 부르고, 미래는 불안을 부르는 법인 것을. 책쾌는 그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내들만큼 자유롭진 못한 삶을 살고 있으니, 그 답답함을 이루 말하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한참은 어려 보이는 책쾌 청년은 글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어릴 땐 아비의 말씀을 자라서는 지아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팔자의 대해서 너무나 잘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애통함이 있었는지, 책쾌의 위로를 듣고 눈물을 훔치는 여인도 있었지요. 그러나 도란도란 순조로운 시간을 보낼 리가 없지요. 태성 도령이 제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헛기침 소릴 내자 여인들은 화들짝 놀라서는 뒤로 물러났습니다.
"뭐 구경났나? 하던 거 계속해봐라. 운명학까지 깔짝거리고 제법이고...?"
"도련님께서도 명리학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당나라에서는 이미 인재 등용을 할 때, 기문둔갑이나 운명학을 적용한다고 합니다.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이 편찬한 저서에서 발견하였지요."
"다 헛소리다. 카면 같은 날 태어나면? 운명도 똑같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마라."
"물론 운명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없지요. 명리학은 그저 도화선일 뿐이며,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심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이지요."
"당연한 말을 누가 못하노? 재미 대가리도 없는 거."
"그래도 운명학이라는 지각이 있으신 걸로 봐선 아예 관심이 없진 않으셨나 본데..."
"아이, 그야... 요새 개나 소나 명리학이니 오행이니 어쩌니 하니까 쪼매 아는 거다, 쪼매! 뭐... 닌 얼마나 좋은 때 태어나가 여자 끼고 낮부터 놀고 앉았노? 도화살이 그득한갑네."
"하하... 복사꽃마냥 곱게 봐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을해년 무인월 호랑이로 났습니다. 봄이 시작하는 때에 청명한 구름으로 났더라면 삶이 조금이라도 순탄했을까 싶습니다만, 큰 바다로 태어나 담길 그릇을 찾긴 글렀다고 제 조부께선 안타까워 하셨지요."
"원래는 호걸인데, 세상을 잘못 만나서 이래 장돌뱅이가 됐다 이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운은 잘 타고났는 갑네, 그래도... 사람 끄는 재주는 있는 거 보이까."
"제게 끌리십니까?"
"뭐! 무슨 소리! 미쳤나?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
귀까지 빨개져선 또다시 버럭 대는 태성 도령에 책쾌 청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습니다. 그의 반응이 재밌었던 것이지요. 사실 여인들에게 친절한 책쾌이긴 하나 그 또한 태성 도령을 마주하고 있을 때, 가장 즐거워 보였습니다. 운명학을 가지고서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자니, 저 또한 흥미가 일어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사내들끼리의 대화가 이리 재미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이씨... 내만 나타나면 가스나들 전부 다 집에 가뿌네. 니도 걍 늦었는데, 드가라. 쓰자리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낸 갈 테니까. 흠..."
"알겠습니다. 살펴 가시지요. 오늘도... 제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봐 주실 겁니까?"
"아이, 진짜! 내가 언제 지켜봤다고! 본 적 없다고! 빨리 안가나! 하, 진짜 잘난 척 윽시 하네...거..."
태성 도령은 얼굴이 과실마냥 무르익어서는 바락댔고, 책쾌는 살포시 웃으며 천천히 자리를 떴습니다. 본래는 똑바로 서서는 사라지는 책쾌를 지켜보았으나, 그날은 들킨 것이 부끄러웠는지 뒤돌아 서서는 그저 몰래 흘끔거릴 뿐이었지요. 그 모양새가 어찌나 우습던지.
그러나 그 재미난 구경거리도 그리 오래가지 못 했습니다.
제 뒤로 시커먼 무리가 들이닥쳐 왔는데, 글쎄 거들먹거리는 데다 방정하지 못한 태도를 보아하니 잘 모르긴 해도 질이 나쁜 시정잡배들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글쎄 저를 지나쳐서는 책쾌쪽으로 슬슬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예감이 좋질 않았습니다. 수가 적었다면 제가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댓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낄낄대는 폼이 저조차도 겁이 나서는 다리가 후들거려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그들은 책쾌에게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이여어... 책쾌 양반! 요 며칠 장사 잘된다 했디만...? 공대감 도련님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네? 우예...뭐 얼굴로 꼬시기라도 했나? 여자도 꼬시고 재물도 좀 생기고... 아이고... 윽시 부럽네?"
잡배들 중 하나가 책쾌의 턱을 건들며 낄낄댔고, 책쾌는 손을 피하며 그들을 노려봤습니다.
"가던 길 가시지요. 일 없으시면..."
"허어? 가만보마 샌님같이 생겨가 겁도 없고...상남자가 따로 없데이? 뽀얗게 해갖고 집에서 공부만 했을 것 같은데... 싸움도 좀 하나? 함 확인해볼까?"
그들 중 가장 몸이 단단해 보이는 이가 주먹을 쥐어오며 책쾌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이것 놓으십시오!"
"아이, 우리 구역에서 허락도 없이 장사하는데... 주의를 좀 줘야 안 되겠나? 어?"
잡배의 손을 떼어내려는 책쾌를 다른 놈이 우악스럽게 잡아끌어 버리는 바람에 옷이 찢어질 지경까지 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저의 뒤로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성 도령이었습니다.
"새끼들... 어디를 뭐, 누구 구역이라 카노...? 내 구역이다, 이 찌끄러기 새끼들아! 등신 같은 것들!"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태성 도령의 등장에 잡배들은 흠칫 놀랐습니다. 비록 수는 잡배들이 더 많았으나 도령은 엄연히 양반이었으니까요. 거기다 성미는 또 어찌나 불같고 급한지, 그 말을 하면서 책쾌의 멱살을 잡은 놈의 등을 걷어차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맥도 못 추고 쓰러지는 놈으로 인해 잡배들은 쪼는 듯 하더니, 그래도 자기들 머리 수가 더 많다고 태성 도령 하나를 상대로 우르르 덤비기 시작했습니다. 싸움판이 벌어졌지요. 그러나 양반 자제라고 곱게 학문만 쌓은 건 아닌 모양이더랍니다. 태성 도령의 주먹과 발길질에 잡배들은 정신없이 얻어맞으며 나가떨어졌습니다. 책쾌는 이러한 상황에 많이 놀란듯하나, 태성 도령이 혼자서 건달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곤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느꼈는지 저가 가진 두꺼운 서책으로 놈들의 뒤통수를 갈겼습니다. 서책이란 참 무서운 물건이더군요. 천자문과 논어로 머리를 맞은 데다, 태성 도령이 팔 척 같은 다리로 걷어차는 통에 놈들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 하고 더 맞을까 싶어 급히 몸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겨우 불청객들을 쫓고 두 사람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 내쉬었죠. 이기긴 했으나, 흙먼지에서 몸을 그리 휘둘렀으니 꼬질꼬질한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서로의 지저분해진 행색이 어이가 없었는지 둘은 서로를 흘긋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지요. 이번엔 책쾌 또한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습니다. 태성 도령은 제 저고리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고 동그란 물건을 꺼내어 책쾌에게 쥐여주었습니다. 연고인 것 같았습니다.
"...발라라. 멍들었을낀데."
"괜찮습니다. 뭐 멍은 도련님이 더 많이 들었을낀데."
"...주면 좀 감사합니다, 캐라. 자, 받아라."
"굳이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야, 돈도 없어가 의원 부를 형편도 안될낀데 그 약 귀한 거니까 줄 때 발라라... 내가 발라주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알아서...잘..."
태성 도령이 말을 먹은 것처럼 우물거렸는데, 그 말을 듣던 책쾌는 놀란 얼굴을 하며 태성 도령을 바라봤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게다가 볼은 붉었지요.
"...와 도련님이... 못 발라준다는 겁니까?"
"아이, 몰라서 묻나? 하... 됐다. 말을 말자. 집 어딘데? 데려다줄 테니까 가자."
"계속 혼자 잘 갔습니다."
"...니...꼬라지 그러고 다닌다고 티 안 난다 생각하는 가본데... 긴가민가 했디만..."
"네...?"
"가시나가 머스마 옷 입었다고 속아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디 해지고 세상 무서븐 것도 모르고! 니 그... 사내 아닌 거는 내 모르는 걸로 할 테니까 집에 갈 때는... 혼자 가지마라."
그 말을 듣는데, 책쾌도 놀라서는 눈이 동그래졌습니다만, 저 또한 놀랐습니다. 책쾌가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듣고 다시 보니 왜 그리 얼굴선이 곱고, 목소리 또한 낭랑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책쾌는 당황하는 듯 했으나 이내 웃어 보였습니다.
"운명학... 관심 많으셨군요. 제 운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팔자가 아니라는 걸 아시고서 그럼..."
"아, 쪽팔리니까 아는 척 그만해라. 집 어딘데! 가자!"
"따라서 오십시오. 조금 오래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뭐... 땅끝마을이라도 되면 그마이 데려가 보던가, 어? 야, 야! 니 가스나가 어디 겁도 없...이!"
"가스나가 아이고...서가의 은재입니다. 은재라고 부르면 됩니다."
"...카면 니도 그냥 태성이라 캐라. 내도 을해년생이니까."
"네...? 그래도 육두품이신데..."
"좀 사람이 잘해주면 네, 감사합니다... 라고 캐라!"
"...풉!"
"와 웃는데?"
"그래... 고맙다, 태성아."
"참나... 그, 고만 쳐다보고 빨리 가자. 해 떨어진다."
은재라는 이름의 책쾌 청년이 아닌 용감한 여인은 태성 도령의 손목을 끌고선 제집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처음엔 손목을 잡고 이끌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더군요. 아무도 없는, 오로지 저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입니다.
그 뒤, 책쾌인 서 씨가 여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걸 태성 도령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행여 티를 내었다가 여인들이 도망갈까 싶어 몰래 저가 읽었던 서책만 조용히 책쾌에게 전하고는 재빠르게 사라졌지요. 그리고 해가 넘어갈 때쯤, 책쾌가 자리를 뜨려 할 때면 데려다주기 위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러고 손을 잡고서 노을 속으로 사라졌지요. 그게 제가 계림에서 머물며 본 두 사람의 연애사였습니다.
태성 도령은 책쾌가 자유롭게 사내 행세를 하며 학문을 나누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듯했고, 여인으로서 불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도움을 줬습니다. 책쾌 또한 그런 그의 배려에 감동을 받은듯 했고요.
이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랑 이야기는 아니한 거 같아 평생 저에겐 재미난 소재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도 흥미롭게 들어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금쯤 두 사람은 어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계림에 가게 되거들랑 책쾌가 앉아있던 골목을 다녀오고 주군께 꼭 뒷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밤이 늦었네요. 얼른 침소에 드시지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만.
나리, 백합의 순 우리말. 순수한 사랑
글쓴이, 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