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선한 바람이 검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모래 먼지와 즐겁게 춤을 추는 바람에 눈을 찡그릴 만도 하건만, 앳된 외모의 소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엉망이 된 머리칼을 정리할 뿐이었다. 머리를 대충 정리한 소년은 손을 내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일정한 보폭으로 벌어질 때마다, 발목을 스치는 로브가 살랑거렸다. 계속 걷는 소년과 그 소년이 걸어온 방향으로 나부끼는 바람. 주위를 둘러보던 소년이 짧은 한숨을 토했다. 이번이 다섯 번째였나?
무심한 눈동자로 바람의 장난에 휘말려 가지를 바르작거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용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작은 용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허공을 짧은 앞발로 내리치고 있었다. 라온. 최한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라온이 씩씩거리며 답했다. 최한아, 아무래도 이 위대한 내가 속은 것 같다! 절망 어린 그 외침에 작은 용을 제 품에 안은 최한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석 달 전의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 날도 최한과 라온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해 마지않던 이를 그리워하며 짱돌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한은 서재에 앉아 몇 번은 읽었던 역사서를 차분히 넘기고 있었다. 끝까지 다 읽어낸 최한이 책을 덮고 책을 돌려 표지를 바라보았다. 『케일 헤니투스 연대기』 제목을 한 번 쓰다듬은 최한이 눈을 감고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의 소유자를 떠올렸다.
케일 헤니투스. 이 대륙의 모든 사람이 아는 그 이름. 하얀 별을 무찌르고, 대륙을 그의 마수에서 지켜낸 영웅.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할 힘을 가진 그였지만, 한편으로 케일 헤니투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도 흘러가는 시간을 잡지는 못했고, 결국 찬란했던 영웅은 이름만을 남긴 채 세상에서 그 불씨를 죽였다.
케일 헤니투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 세상의 통제를 벗어났다. 최한은 그들 모두의 죽음을 눈으로 새기고, 가슴으로 새겼다. 그리고 돌아오는 날마다 빼먹지 않고 그들과 하나가 된 땅 위에 하얀 국화를 올렸다. 늙어 생을 다한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전혀 늙지 않는 저 자신을 옭아매는 저주에 홀로 눈물을 흘리길 몇 날이 지났다.
마음만 같아서는 케일이 죽은 후 자결을 함으로써 그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최한이었지만, 그는 그 계획을 제 손으로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마저 떠나면 홀로 남게 될 작은 용에 대한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자신마저 그를 떠나면 그는 진실로 이 세상에 그를 알아주는 이 없이 홀로 남을 것이 뻔했고, 홀로 어둠의 숲에서 살아남았던 기억을 가진 최한은 라온에게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한은 제 죽음을 조금 더 미루기로 했다.
책을 고이 모셔둔 최한이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라온을 찾아 저택을 돌아다니던 최한은 다급한 음성으로 저를 부르는 라온의 외침에 얼굴을 굳혔다. 시시때때로 마을에 놀러 가던 라온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최한에게 날아와 그의 주위를 어수선하게 날아다녔다. 라온을 진정시키던 최한은 그가 진정한 후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라온이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크게 외쳤다.
"비크로스, 비크로스를 봤다, 최한아!"
비크로스? 비크로스라면 케일이 죽고 세 번째로 그의 뒤를 따랐다. 즉, 이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비크로스를 보았다? 최한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라온을 바라보자 라온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환생이다! 분명 환생한 게 틀림없다! 라온의 말을 들은 최한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죽은 이들이 다시 새 생명을 부여받아 환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최한은 라온을 따라 저택을 나섰고, 정말 비크로스를 보았다. 어린 몸이지만 얼굴에 드러난 표정과 더러운 것에 경멸을 띄는 것이 분명 그가 맞았다. 살아있을 적엔 그토록 거슬리고 짜증이 났는데, 다시 보는 그 얼굴이 반갑게 느껴졌다. 비크로스를 만난 후, 최한과 라온은 다른 이들의 환생을 찾아 대륙을 돌았다.
대륙을 돌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환생을 너무 많이 만났고, 둘의 기대치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정말 케일의 환생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있는 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몇 년이 흘러도, 케일의 환생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둘은 기대에 부풀었던 만큼 큰 절망에 빠졌다. 다른 이들의 환생은 몇 번이고 봤는데, 어째서 케일의 환생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좌절에 빠져있던 최한의 눈치를 보던 라온이 입을 우물거리더니 이곳에 와서 들은 소문을 이야기했다.
최한아, 이 동대륙에 소원을 들어주는 백호가 있다는 데 들은 적 있나?
최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미신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라온은 그런 최한의 말을 흘려듣고는 흥분하며 눈을 빛냈다. 최한아, 그 백호를 찾자! 그래서 그 백호한테 약한 인간의 환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어차피 계속 찾을 수 없다면, 미신에 잠깐 기대는 것도 괜찮지 않으냐는 라온의 말에 최한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라온과 최한은 동대륙에 있는 산이란 산은 탐색하며 유력 후보지를 추렸다. 그리고 지금 다섯 번째 허탕을 치는 중이었다. 미신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토라진 라온을 보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 그를 다독였다.
"무려 소원을 들어주는 백호잖아.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 기회를 죄다 가로챘을 거야. 조금만 더 힘내보자."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를 맡기던 라온이 작은 앞발을 꼭 쥐고 외쳤다. 나는 위대하니까, 꼭 찾아낼 거다!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라온을 보며 최한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바로 여섯 번째 후보지로 이동한 최한과 라온은 흩어져서 백호의 기운을 탐색했다. 그리고 이곳을 뒤진 지 어언 30분이 흘렀을까. 최한과 라온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최한아, 아무래도 여긴 것 같다."
"그런 것 같지?"
최한이 검을 빼 들었다. 미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미신이 아니라 진짜였나 보다. 한순간이지만 라온과 최한 모두 이 산에서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온몸의 감각은 곤두세운 최한이 주위를 살폈다. 어디지? 그 순간 그들의 앞, 허공이 허물어지더니 어둠으로 물든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그들의 존재를 안 누군가가 그들을 초대하듯, 그 입구를 선보였다. 함정일까? 고민하던 최한은 말릴 새도 없이 동굴 안으로 날아간 라온을 보며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길지 않은 동굴의 끝에 도달한 한 마리의 용과 인간 하나는 그토록 찾아다니던 이를 만났다. 최한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백호……"
최한과 라온을 번갈아 바라보던 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작은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원을 빌러 온 것 같아서.]
나른하게 늘어진 백호를 바라보던 라온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백호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위대한 용, 라온 미르다! 백호, 정말 소원을 들어주나?! 라온의 물음에 백호는 웃음을 머금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라온이 뒤를 돌아 최한을 바라보았다. 입가가 묘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지금 웃음을 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백호, 부탁이 있다! 내가 찾는 인간이 있는데, 그의 환생을 찾고 싶다!"
한순간이지만 백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 기쁨에 겨워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호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자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호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자 최한과 라온이 그제야 슬슬 몰려오는 불안감에 눈을 굴렸다.
[아마 너희가 찾고 있는 인간이, 케일 헤니투스지?]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겠어. 그는 환생하지 못했으니까.]
"뭐?"
백호는 보았다. 한순간 최한과 라온의 얼굴에 서린 절망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백호는 자신이 아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케일 헤니투스는 이 대륙의 영웅이자, 고대의 힘을 모두 소유한 자였어. 하지만 그가 죽어 환생의 저울에 섰을 때, 그의 영혼이 너무 쇠약해져서 도저히 환생할 여력이 되지 않았거든. 그래서 환생자들을 관리하는 신은 그에게 영혼의 회복을 권했고, 그래서 그는 지금 회복 중에 있어. 너희가 그동안 그의 환생을 찾지 못했던 것도 당연해.
[너무 걱정하지 마, 회복이 거의 끝나가는 단계니까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도 너희를 보고 싶어 할 거고.]
백호의 다독임에 축 늘어져 있던 라온이 등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라온은 최한에게로 다가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최한은 그런 라온을 제 품에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백호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여기까지 왔으니 소원 들어줄게. 둘 다 하나씩 말해봐.]
"나는, 그냥 약한 인간이 최대한 빨리 회복하고 만났으면 좋겠다!"
라온이 백호와 최한의 주위를 방방 날아다녔고 백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최한, 너는? 백호에게 이름을 불린 최한이 흠칫 놀라자 백호는 안심하라는 듯 눈을 반달 같이 휘어 보였다. 심장을 잠시간 머뭇거리던 최한이 입을 열었다.
"케일님을 포함한 모두, 모두가 이번 생도, 앞으로의 생도 행복할 수 있게 해줘."
[너에 대한 소원은 빌지 않는 거야?]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야."
굳은 심지 같은 눈동자를 마주한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백호와의 이야기를 끝마친 최한은 라온을 데리고 들어왔던 입구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나중에 약한 인간을 소개해줄 테니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 라온과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최한을 바라본 백호가 웃었다.
정말 너희다운 소원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네.
동굴에 홀로 남은 백호에게서 하얀빛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백발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기지개를 한 번 펴더니 제 앞에 열린 하얀 포탈을 향해 걸었다. 이제 회복의 시간이 끝났다. 소원 100개를 채웠으니 이제 그도 환생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생겼다. 하얀 포털로 발을 들인 케일의 모습이 끝도 없는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의 만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너희 둘의 소원 들어줄게."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