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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2차 연성입니다. 캐붕과 날조 주의.

* 사방신 합작 중 현무로 참여했습니다.

* 신관 케일과 호위무사 최한의 이야기입니다. 적당한 동양 AU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드라마 '밀회'의 대사를 인용했습니다.

* 오타 지적 및 피드백 환영.

 

오직 다섯 가지의 색으로만 이루어진 단조로운 구중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 궁의 대문을 열고 소문으로 들어서는 이의 발걸음이 부산스럽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 새하얗게 뒤덮인 대전의 앞마당에 남겨진 촘촘한 발자국들이 다급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국가 내 지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모든 신관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를 할 수 있는 장소, 월하月下관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자 사내는 그제서야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언제 급했냐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회의장 바로 앞에 서서 한밤의 하늘을 수놓은 듯 검푸르게 빛나는 의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손길은 투박했지만 세심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사내가 비장한 눈빛으로 월하관의 문을 열어젖혔다. 펼쳐진 내부의 정경을 차지하는 인물은 무척이나 많았으나,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이는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한겨울의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그리고 냉정한 것 같지만 남모를 다정함을 숨기고 있는 푸른 눈의 대신관.

 

"케일 님."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했구나, 앉거라."

"네."

"최한까지 왔으니 회의를 시작하지."

 

겨울밤처럼 쉽게 끝나지 않는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대신관의 목소리에, 장내의 소란은 금세 잠재워졌다. 겨울 신관들의 회의는 모두가 잠에 드는 밤부터 시작되었다.

 

 

 

 고해의 무덤

https://youtu.be/TfJN4LQblxw

최한 X 케일 헤니투스

 

대륙의 북쪽 산간에 위치해 사방신 중 죽음과 소멸을 담당하는 현무를 모시는 국가, 흑석黑石국에는 현무의 뜻을 대변하는 겨울 신관이 존재한다. 겨울 신관은 흔히 대신관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흑석국을 대표하는 계절이 겨울이기 때문이었다. 사방신 중 가장 음기가 강한 현무가 주둔하고 있는 탓에 귀신의 출몰이 잦으나 주로 현무에게 복속되는 경우가 많아 국가 내 치안과 질서의 유지에는 큰 문제가 없는 편이다. 겨울 신관은 오로지 현무의 선택으로 채택되며, 현무가 제시하는 조건과 그의 안목이 까다로운 탓에 신관의 교체는 극히 드문 편이다. 현재 겨울 신관직에 올라있는 케일 헤니투스의 경우에도 열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약 80여 년 정도 직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겨울 신관이 되면 현무가 내리는 축복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새로운 후임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신관은 영원불멸의 삶에 준할 정도로 수명이 연장되고, 성장이 멈추어 외모를 비롯한 신체적인 노화가 대신관 취임 당시의 나이로 고정된다. 즉, 시간이 지나도 지난 것이 아니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오만하고 고고한 존재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현무의 애정을 받는 이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랄까. 이를 두고 현무의 축복이냐, 저주냐로 끝없는 논쟁이 이어져왔지만 이는 결국 신관 본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케일은 현무의 축복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인간은 나약하고 무력하기에 적당한 타협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리고 어차피 오래 일할 거라면 신체적인 노화로 인해 고생하는 것보다는 젊고 튼튼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필멸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멸자와 같은 삶을 사는 축복 외의 다른 하나는, 치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죽음과 소멸을 담당하는 현무를 모시는 자가 지니는 치유력이라니. 다소 역설적이게 느껴질 수 있었으나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는 법이라는 현무의 뜻이었으니 달리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아마 현무는 이 힘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고, 아픈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따스한 마음씨를 갖추길 소망하는 동시에 '죽음'이라는 생의 종착점을 인지하며, 엇비슷하지만 매일 다르게 주어지는 삶을 성실하게 사는 신관이 되기를 바라는 듯했다. 역대 대부분의 겨울 신관들은 현무의 뜻에 따랐으나, 그중에서도 케일처럼 현무의 축복으로 뽕을 뽑은 이는 극히 드문 편이었다.

현무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고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 만큼 한 명 한 명이 모두 뛰어났으나 케일만큼 신도들에게 각광 받는 이는 전무후무했다. 그가 뛰어난 대신관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한 손가락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으나, 모두들 입을 모아 칭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타심과 정의로움을 두루 갖춘 인품이었다. 모든 일에 앞장서지만 자신을 위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 그런 케일에게 매료되어 그를 따르는 신도들의 물리적인 숫자도, 맹신도도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에 불과했다. 다른 사방신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케일을 현무의 재림이라 칭했으나, 정작 케일 본인은 이 말을 무척이나 꺼려 했다.

 

'제발 그만 띄워대라...'

'내가 현무였으면 이런 짓을 하고 있겠냐?'

 

현무의 사자使者이자, 겨울의 신관은 대대로 과로의 상징이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대신관에게 돌아오는 업무량은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케일의 흰 머리칼이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을까. 다소 전통스러운 방식을 고수하는 흑석국인지라 서류에는 케일의 서명 대신 옥쇄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 옥쇄가 어찌나 무거운지. 결정에 따른 책임감의 무게를 알라는 현무의 의도는 좋았으나 하루에 50번 이상 옥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일은 하나의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사람들의 말대로 자기가 현무 그 자체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케일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도 한껏 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 지루한 회의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귀신이 아니고서야 알 수가 없었다.

아, 이 거지 같은 회의에 두 번씩이나 버려지다니.

규정대로라면 신관들의 회의는 한 달에 단 한 번만 열리는 것이 정석이다. 범국가적 차원의 천재지변이나 현무의 뜻으로 신관을 소집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한 번 이상 열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이레적인 경우였기에 회의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현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경선 근처에서 일어난 거주민들의 폭동이었다. 중앙에 터를 잡고 있는 현무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미칠 수밖에 없는 국경선 근처에서 귀신을 비롯해 음의 기운이 강한 괴물들이 나타나 거주민들의 터전을 망쳤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각 부처의 행정 관리들 간 책임 전가가 화근이 되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정부밖에 없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주민들의 분노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이는 결국 폭동이라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었다. 부서끼리의 책임 전가는 결국 대신관 밑,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부처의 수장首長끼리의 경쟁이었다. 사고를 쳤으면 책임을 지고 깔끔하게 처리하면 될 일을 질질 끌다 정치적 논쟁으로 번지게 하는 것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관대한 마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치졸한 싸움으로 모든 신관을 소집할 정도로 일이 커진 적은 처음이었기에 케일은 화가 치밀었다.

 

신을 믿는 자들이 가장 순수하고 결백하다고?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은 신을 앞세워서 자신의 추악한 면을 덮을 뿐이다. 신의 뜻이라는 변명은 곧 가장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되니까.

 

"부끄럽지도 않소? 현무 님께서 이 일을 본다면 참으로 좋아하겠소이다!"

"말 한 번 잘하셨네. 지금 여기가 어느 자리라고 현무 님의 이름을 꺼냅니까?"

"애초에 현무 님의 이름을 꺼낼 일 없게 잘 하셨어야지요!"

 

이 봐라. 개판 5분 전 아닌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케일의 눈빛을 눈치챈 것은 오직 대신관의 호위, 최한 뿐이었다. 10년 전 케일이 성곽으로 야행을 나섰다가 홀연히 데려온 아이.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일곱 살이었으나 이제는 열일곱 살이 되어 곧 성년을 앞둔 어엿한 청년이었다. 현무의 뜻과는 상관 없이, 오로지 케일의 뜻대로 배 곪고 혹독한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불쌍한 강아지를 떠올리게 해 궁으로 데려와 거둔 것 뿐인데 어느 날부터 밥값을 하겠다며 케일의 호위를 자처한 심성이 곧은 이었다. 케일은 이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자기를 위해서 일해준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언제나 그렇듯이 케일의 뒤에 서서 묵묵히 돌아가는 상황을 관전하던 최한은 이내 작은 목소리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이번에는 호조戶曹 측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안다."

"혹시 마땅한 명분이 없으셔서 가만히 보고 계신 겁니까?"

"그래."

 

호위였지만 머리도 꽤 비상한 축에 속하는 최한은 케일의 책사로도 일했다. 일종의 부업 같은 것이었다. 케일이 처음 최한의 실력을 알았을 때에는 문과 무에 골고루 능한 인물이니 제 뒤를 이을 후임자로써 적격이라 생각했으나 현무는 성에 차지 않는지 지금까지도 최한을 후임자로 임명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 보다 최한이 나은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케일 이전 신관들의 평균적인 재위 기간이 70년 정도라기에 내심 기대했거늘, 신은 늘 인간의 소박한 희망에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럼 은밀하게 처리할까요?"

"... 은밀하게 뭘 어쩌려고?"

"음... 쓱싹?"

 

잘 나가다 말고 왜 거기로 빠지는 건지. 틈만 나면 케일의 말에 반기를 드는 놈들을 현무의 곁으로 고이 보내려 하는 최한을 볼 때마다 케일은 심란함과 동시에 심장이 떨려왔다. 절대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는 선조들의 격언은 토씨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순하게 생겨서 분위기까지 선한 놈이 하는 짓은 야차와 같이 거침이 없었고 어떨 때에는 무자비하기까지 했다. 어느 쪽이 진짜 모습에 가까운지는 몰라도, 케일 본인에게는 위협을 가한 전례가 없으니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대신관이 애한테 쪼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게 뭐 있다고 티를 내나.

무의미한 논쟁도 벌써 8시간 째였다. 밖에서는 붉은 태양이 기와지붕 너머로 빛을 비추며 밤과 새벽의 경계선을 가르고 있었다. 더 이상의 언쟁은 피로만 쌓이게 할 뿐,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불가할 테니 잠시 휴회를 하자는 케일의 의견에 반하는 이는 없었다. 밤에 회의를 재개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떨어진 케일의 축객령에 피곤에 찌든 신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빛의 속도로 월하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고서야 가장 마지막으로 밖을 나서는 케일의 다리는 볼품없이 떨려왔다.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대신관의 안쓰러운 뒷모습을 지켜보던 최한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케일 앞에 무릎을 꿇고 제 등을 내주었다.

어이구야.

저보다 한참 어린애 등에 업히기에는 양심이 아파왔지만 지금 케일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도 오래 앉아있는 바람에 다리에 쥐가 나 걸을 때마다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으니까. 자신의 처지를 애써 합리화하며 순순히 최한의 등에 몸을 맡긴 케일은 힘없는 목소리로 침소로 향할 것을 부탁했다.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쉴 수 있는 삶이라니. 일이고 뭐고 다 미뤄둔 다음 최대한 빨리 뜨끈한 온돌 바닥에 누워 보드라운 비단 이불을 덮고 맛있는 귤이나 까먹고 싶은 욕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케일 자신도 애처롭고 불쌍하지만, 이런 주인을 모시는 덕에 불철주야 고생만 하는 최한도 괜히 불쌍하게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안 무겁니?"

"빗자루보다 가볍습니다."

"..."

칭찬인가? 욕인가?

 

"밥 좀 많이, 그리고 자주 드세요."

걱정이구나. 나 밥 잘 먹는데?

 

케일 스스로는 지금도 충분히 밥을 잘 먹고 있다 생각해 짧게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침소 앞 정원이 보이기 시작해 내려달라는 듯 다리를 휘저었으나 최한은 그저 꿋꿋하게 직진했다. 빠른 체념과 동시에 케일의 눈에는 새하얗게 물든 정원 곳곳에서 매화 꽃봉오리가 움트고 있는 것이 담기고 있었다.

벌써 봄이 오는군.

덧없는 세월은 참 쏜살같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케일은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케일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최한은 목적지 앞에 도착한 후에도 그를 업은 채 침소 안까지 들어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때마침 케일의 시중을 드는 이가 몸에 좋다는 약재와 향료를 가득 담은 목욕물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차마 욕조 안에 직접 담그지는 못하고 어색하게 예를 올린 뒤 문밖으로 나가는 최한을 보는 케일의 눈빛은 미묘했다.

부유하는 불투명한 물 사이로 떠오른 희고 긴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문득 방금 전에 보았던 매화가 떠올랐다. 흰 눈 사이에 고결한 자태를 뽐내고 있던 붉은 매화. 원래 케일의 머리는 지금의 흰색이 아닌 붉은색이었다. 예로부터 흑석국에서는 붉은색이 피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불결하게 여겨지는 색이었다. 때문에 대신관의 자질이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케일이 새빨간 머리칼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능력을 폄하 받을까 우려했던 현무는 그에게 염색 마법을 걸어주었다. 오직 현무와 케일, 둘만이 아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현무의 가호 아닌 가호 덕택에 신관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성스러운 흰 머리칼과 푸른 눈을 하사받은 케일은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덧없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게 문제였지. 이렇게 하루를 바쁘게 지내고 홀로 있을 때면 모든 것이 재미없게 느껴지고, 나태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더 일에 매달리는 것도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현무의 큰 그림 중 일부인가 싶을 정도로.

잡생각의 끝은 결국 우울함이라는 사실을 긴 세월의 혜안을 통해 깨달은 케일은 이내 반신욕을 때려치우고 몸 위에 얇은 옷 하나만을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걸어온 만큼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밖에서 기다릴 제 호위, 최한이 침대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오늘 너무 혹사시켜서 나를 죽이려는 건가? 아까까지 머릿속을 차지하던 축축한 생각들은 최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증발된 지 오래였다.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내뱉은 목소리는 케일의 바람과는 달리 형편없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그, 다름이 아니고..."

"별거 아니면 빨리 말해."

"케일님 잠자리 시중 들어드리려구요."

 

아니 사지 멀쩡한 시종들 내버려 두고 왜? 그리고 언어 선택이 왜 그래? 의구심이 가득한 케일이었지만 일단은 수긍했다. 괜히 밉보여서 내 목이 썰리면 어떡해. 다행스럽게도 최한은 칼이 아닌 수건과 빗을 들고 케일의 뒤에 다가가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털어냈다. 다만 그 손짓이 미숙했기에 케일이 간단한 신력神力을 운용해 간단하게 끝내버렸을 뿐. 그나마 이전에도 몇 번 해본 적 있는 빗질은 나은 편이었다. 겨울의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비단결 같은 부드러운 흰 머리칼.

그 누구보다도 대신관의 격에 어울리는 색이라는 것을 알지만 최한은 케일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케일의 진짜 머리색은 붉은색이고, 가끔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제 목숨을 지키는 사람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극비 사항 중 하나라며 케일이 털어놓은 것이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비밀을 알아버린 최한에게는 이 사실이 꽤 막중한 의무감으로 돌아왔다.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모든 것을 심판할 것 같은 순백의 색이 아닌, 타오르는 생명력을 나타내는 색이자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날 피의 색이 어울릴 것 같은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무슨 상념에 빠진 것인지 입은 꾹 다물고서 꽤나 진지한 얼굴로 열과 성을 다해 제 머리칼을 빗어내리는 최한의 모습은 쓸데없이 귀여운 구석이 있어 케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주인의 나직한 웃음소리에 생각의 미로에서 헤어 나온 최한은 그제서야 허리를 꾸벅 숙이며 빗을 놓고서 케일을 포대자루 마냥 안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침대 위로 모셔진 케일은 그 누구보다 빠른 손길로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는 최한이 보였다.

그런 케일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최한의 모습은 마치 제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어서 칭찬해달라는 강아지와 겹쳐 보였다. 황당하기는 해도 잘한 건 잘한 것이니 칭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자 뻗었던 케일의 손은 최한에게 잡혀 가로막히고 말았다.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을 담아 바라본 최한의 얼굴에서는 비장함을 넘어 결연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최한이 저런 얼굴을 할 때면 꼭 폭탄 발언을 내뱉는 전적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케일은 두려웠다. 누구를 귀신의 친구로 만들었다거나, 둘이서 산책을 나갔다가 홀로 돌아왔다거나. 아무튼. 여기서 이렇게 갑자기 왜?

 

"케일 님. 정말, 정말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 그, 그래. 얼른 해봐."

"시중을 들겠다는 말은 변명이었습니다."

"그럼?"

"제가... 그... 케일 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너까지 나한테 왜 그러니.

골이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간 최한이 하는 짓을 보아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직면하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다. 최대한 외면하고 싶었다. 필멸자가 불멸에 준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를 사모한다는 말은 제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케일 본인에게 최한의 삶을 걸 가치가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케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는 늘 이성이 앞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에 휘둘려 살기에는 짊어져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현무의 가호를 받는 대신관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좋다며 온갖 애정공세를 퍼부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벽은 견고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부수지 않는 이상, 케일은 또다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사랑만큼 비극적인 건 없다고 본다."

"어차피 모든 이들은 끝을 맞습니다. 저는 그 끝에서도 케일 님과 함께이고 싶어요."

"나는 너에게 잔인해질 수도 있어."

"괜찮아요. 제 이기심이니까."

"내가 안 괜찮아."

"제게는 이 방법 밖에는 없는걸요."

"최한."

"밑질 거 없으시잖아요. 제가 더 사랑하는데."

 

케일은 그 어떠한 대답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사람이 가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거웠고 무서운 것이었다. 결코 가벼운 말로 회유할 수 없으리라.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질 정도로 고심하는 케일의 침묵을 깬 것은 최한이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케일의 손끝에 닿았다 떨어지고, 케일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까부터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처럼 구는 최한에게 적응하지 못한 케일은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 틈 사이로 보이는 붉어진 얼굴까지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본 최한은 케일의 머리칼에 한 번, 이마에도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등에도 한 번 입맞춤을 내리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쟤가 언제부터 저렇게 능글맞았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다가온 열일곱 사내의 변화를 뒤늦게 눈치챈 케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최한은 스스로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침소를 나섰다. 아직은 서늘하지만 따스한 햇빛은 정원에 핀 매화뿐만 아니라 첫사랑을 느끼는 사내의 마음도 간지럽게 만들었다. 오랜 겨울을 끝내고 찾아온 이른 봄날이었다.

 

 

 

고해의 무덤 完

주최 및 개떡 편집-푸실

청룡: 퐁,청은 / 백호: 잡초, 람 / 주작: 앙크, 망각 / 현무: 푸실, 아씨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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